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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흐릿해도 괜찮아

world1000 2026. 4. 14. 03:15

조금 흐릿해도 괜찮아

저녁 무렵 할아버지와 산책을 나왔다. 걸음이 조금 불편하신 할아버지는 저녁마다 이렇게 천천히 걷는 것이 운동이시다. 벚꽃은 거의 다 져 간다. 간간이 흩뿌려지는 꽃잎이 봄눈 같다. 바닥에는 꽃잎이 얕게 쌓여 있었다. 한참을 걷다가 할아버지가 벤치에 조심스럽게 앉으시며 가쁜 숨을 몰아쉬셨다. 그러고는 한마디 툭 던지신다.
"너무 자기 자신을 못살게 하지 마라. 자기 자신을 달달 볶으면 사람이 힘들어져."
나는 할아버지의 뜬금없는 말씀에 할아버지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뒤편으로 지는 해의 따스한 햇살이 삐져나왔다.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빙긋 웃으시고는 한참 동안 말이 없으셨다. 꽃잎이 바람에 한두 장씩 떨어지는 것을 둘이 함께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제가 너무 빡빡하게 사는 거 같아 걱정되세요?" 나는 벤치에 조금 더 깊이 기대앉으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한참 꽃잎을 보시다가 천천히 입을 여셨다.
"빡빡한 건 나쁜 게 아니야. 네가 너를 돌아보는 거니까. 그런데 얘야, 너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딱 정해 놓고 거기에 자기를 맞추려고 하고 있지 않느냐. 한 줄로 자기를 정리해 놓고."
"아..." 나는 말이 안 나왔다. 정확히 그러고 있었다.
"옛날에 말이다, 영국에 러셀이라는 학자가 있었다. 머리가 좋았을 뿐 아니라 마음도 착한 사람이었어."

한 착한 학자 이야기

"러셀이 하고 싶어 했던 일은 이런 것이었다. 수학이라는 것이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기초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납득할 수 있게 아주 꼼꼼하게 보여 주고 싶어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안심하고 그 위에 저마다 다른 튼튼한 집도 짓고 건물도 세울 수 있을 테니까. 세상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헤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한평생 공부를 했지. 

러셀이 어느 날 이상한 것을 발견했어. 너무 단순해서 처음엔 러셀 자신도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잠시 뜸을 들이시더니 말씀을 이으셨다.

"세상에는 무언가를 담는 그릇들이 있지 않느냐. 과일을 담는 바구니, 장난감을 담는 상자, 편지를 담는 봉투. 그릇이라는 건 대개 다른 것을 담는다. 바구니는 사과를 담지 자기 자신을 담지는 않지."

"그런데 러셀이 이런 생각을 해 봤어. 자기 자신을 담지 않는 그릇들만 전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아 놓은 큰 그릇이 있다고 해 보자. 이 큰 그릇은 자기 자신을 담을까, 안 담을까."

"할아버지, 이거 양쪽 다 안 되는데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런데 이 그릇은 '자기를 담지 않는 그릇들'만 모은 곳이거든. 자기가 자기를 담았으니 그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 들어간 셈이야. 규칙에 어긋나. 반대로 안 담는다고 해 보면, 이번엔 이 그릇이 '자기를 담지 않는 그릇'이 되니까 저 큰 그릇 안에 들어가야 해. 그런데 그 큰 그릇이 바로 자기 자신이거든. 자기가 자기 안에 들어가야 한다. 이것도 어긋나.

담아도 어긋나고, 안 담아도 어긋난다. 그런 그릇은 세상에 있을 수가 없더구나.

러셀이 이걸 발견하고는 며칠을 잠을 못 잤다고 한다. 평생 짓던 집의 기초에 금이 가 있는 것을 본 사람의 마음을 짐작해 보아라. 그런데 할아버지는 러셀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게 제일 좋더라. 러셀은 그 금을 못 본 척하지 않았다. 자기가 본 것을 조용히 적어서 사람들에게 알렸고, 그 금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평생 고민했다. 착한 사람이 한 착한 일이지."

인스타그램 계정 이야기

"어려우냐?" 할아버지가 내 얼굴을 살피셨다.
"아니요, 재밌는데요. 근데 좀 추상적이긴 해요."
"요즘 젊은이들 인스타그램이 핫하다지?"
"네, 맞아요."
"인스타그램의 예를 하나 들어볼까? 어떤 계정이 하나 있다고 해 보자. 이 계정 주인이 규칙을 하나 정했어. '나는 자기 자신을 팔로우하지 않는 계정만 팔로우한다. 그런 계정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팔로우한다.' 자기애가 좀 지나쳐서 자기를 스스로 팔로우하는 계정들은 빼고, 그런 짓을 하지 않는 겸손한 계정들만 모아서 팔로우해 주겠다는 뜻이야. 나름 기특한 규칙이지."
"네. 일종의 기준인 거네요."
"그런데 어느 날 누가 그 계정 주인에게 물었어. '그러면 이 계정은 자기 자신을 팔로우하나요, 안 하나요?'"
나는 잠깐 멈췄다. "어... 이거 아까 그릇이랑 똑같은 거 아니에요? 이거 마치 패러독스 같아요. 되는 듯 안 되는 듯."1
할아버지가 웃으셨다. "똑같다. 팔로우한다고 해 보자. 이 계정은 '자기를 팔로우하는 계정'이 되는데, 규칙상 자기를 팔로우하지 않는 계정만 팔로우해야 하니까 어긋나. 그러면 팔로우 안 한다고 해 보자. 이 계정은 '자기를 팔로우하지 않는 계정'이 되니까, 규칙상 반드시 팔로우해야 해. 그런데 안 했지. 이것도 어긋나."
"팔로우해도 어긋나고, 안 해도 어긋나고요."
"그래. 이 계정은 자기 규칙 안에서 자기 자리를 못 찾는단다."
나는 꽃잎을 하나 주워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근데 할아버지, 이 계정 주인이 이상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규칙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고요."
"그렇지. 다른 수만 개의 계정을 팔로우할 때는 이 규칙이 아주 잘 들어맞거든. 딱 한 군데, 자기 자신을 대할 때만 문제가 생기는 게야."
"왜 자기 자신한테만 문제가 생길까요?"
할아버지는 내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이 계정 주인이 다른 계정을 볼 때는 일이 간단해. '저 계정이 자기를 팔로우하나?' 하고 밖에서 쳐다보면 되거든. 그런데 자기 자신을 볼 때는, 보는 눈도 자기고 보이는 얼굴도 자기야. 보는 쪽과 보이는 쪽이 겹쳐 버리니, 규칙이 갈 길을 잃고 뱅뱅 도는 거지. 꼬리를 잡으려고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도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아,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그래서 러셀이라는 학자가 나중에 해결책을 하나 내놓았는데, 그게 참 지혜롭더구나. '묶음(집합)은 자기 자신을 담을 수 없다'는 규칙을 새로 만든 게야. 쉽게 말하면, 이 계정 주인도 규칙 끝에 한 줄만 덧붙이면 되는 거지. '단, 내 계정 자신은 빼고'라고 말이다."
"나 자신은 예외로 둔다...는 거네요?"
"그래. 자기를 관찰하고 규칙을 정하는 '나'는, 그 규칙 속에 갇혀 있는 '나'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야. 그래야 계정이 터지지 않고 계속 굴러갈 수 있거든. 자기가 만든 규칙 안에 자기 전부를 욱여넣으려고 하지 않을 때, 비로소 그 규칙도 쓸모가 생기는 법이란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 말하는 일은 친구에 대해 말하는 일과 똑같을 수가 없어. 어떤 말로 자기를 설명해도, 자기 자신을 바깥에서 바라볼 수도 없고 자기 속을 다 들여다볼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왜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도 있잖니. 자기 자신을 볼 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 덧씌워져 있을 수도 있거든."
"그러네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자기를 한 문장으로 정해 놓지 마라
할아버지가 잠깐 숨을 고르시고는 내 쪽으로 몸을 돌리셨다.

 

내가 아는 너보다 네가 늘 좀 더 크더구나. 


"'나는 이런 사람이다' 하고 정해 놓는 게 꼭 나쁘다는 말은 아니야. 자기를 돌아보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그 한 줄이 너 자신이랑 딱 맞아떨어져야 한다고 믿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그 한 줄이 너를 힘들게 한다."

"어떻게 힘들게요?"

"'나는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정해 놓는다고 해 보자. 그러면 어느 날 거짓말을 한 자기를 발견했을 때 그 자기를 용서하기가 어려워져. '나는 씩씩한 사람이다'라고 정해 놓으면, 눈물이 나는 날에 자기가 미워지거든. 그 한 줄이 너를 지켜 주는 게 아니라, 네가 그 한 줄을 지키느라 진이 빠지는 거지."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할아버지 말이 너무 정확해서였다.

"네가 너에 대해 쓴 한 문장도 그래. 그 문장을 친구한테 들이대면 친구가 어떤 사람인지 어느 정도 설명이 돼. 그런데 너 자신한테 똑같이 들이대면 딱 맞지가 않아. 그건 네가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말하는 일이 원래 그런 거야. 굳이 한 문장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다."

한참 동안 둘 다 말이 없었다. 꽃잎이 몇 번인가 떨어졌다.

"할아버지는 너를 꽤 잘 안다고 생각한다." 할아버지가 다시 입을 여셨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아는 너보다 네가 늘 좀 더 크더구나. 그게 할아버지가 너를 보면서 기쁜 이유야."
목이 조금 메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할아버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꽃잎이 또 몇 장 떨어졌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들어가자"


Footnotes

  1. 버트런드 러셀이 1901년에 발견한 이 모순을 '러셀의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당시 수학의 기초로 여겨지던 소박한 집합론(naive set theory)이 이 패러독스 때문에 근본부터 흔들렸고, 이후 체르멜로-프렝켈 공리적 집합론(ZFC)이 그 대안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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